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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새벽칼럼] ‘아빠!’를 부르는 어린애의 울음소리, 어둠 속으로 꺼진 어깨가 휘청였다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입력 2024.06.06 11:01 수정 2024.06.06 11:17


↑↑ 고아 강정숲
[사진 출처= 시인 조경래]

[k문화타임즈 =발행인 김경홍/시인·소설가]
법원 문을 나서자, 어둠이 쏟아졌다. 바람이 이팝나무에 걸터앉아 토악질을 해댔다. 그 거리에, ‘아빠!’를 붙잡는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나뒹굴었다. 딸을 부둥켜안고 떠나는 젊은 아낙의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잘 살아!”
“그래, 당신도...”
그렇게 그들은 남남이 됐다.

새벽이, 움츠려 누운 중년 사내를 흔들어 깨웠다. 여윈 얼굴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공원을 빠져나갔다.
보름 넘게 거리를 떠돌았다. 밀린 월세를 닦달하는 원룸은 출입을 막아섰다. 어쩌면 그가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작은 공간을 빠져나왔을지도 모른다. 사내의 주머니 속에는 수십 방울의 수면제가 들어있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인 삶은 수면제로부터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코로나는 그를 벼랑으로 내몰았고, 고금리는 고달픈 삶을 벼랑 끝으로 밀어냈다. 직장을 그만둔 그는 퇴직금과 대출금으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하지만, 어렵게 문을 연 식당으로 코로나가 몰려들었다. 손님들은 등을 돌렸다. 그 빈 자리에는 대출금 이자 납부 독촉장이 수북하게 쌓여갔다.
어느 날 식당 문을 폐쇄하고 귀가한 아파트 안은 온통 빨간 차압 딱지였다.

남의 일이 아니다. 어쩌면 언젠가는 우리의 자화상일는지도 모른다. ‘잘못이 내게는 없고, 남에게 있다’는 식의 만연한 ‘남 탓 정치’가 사그라들지 않는 한 우리도 언젠가는 공원 벤치에 움츠린 그 중년 사내가 될 수 있다.

중국 위나라의 혜왕이 맹자에게 자문했다.
“굶는 백성이 늘고 있소. 어떻게 하면 되겠소.”
맹자가 답했다.
“백성들이 굶어 죽는 데도 ‘흉년이 들어 그러니 짐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찔러 죽이고도 칼이 죽인 것이지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폐하께서 백성의 굶주림이 흉년 탓이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군주가 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여파로 세계의 경제 상황이 악화하고 있으니, 우린들 어쩌란 말이냐?”는 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 여당 탓, 야당 탓, 부하 탓으로 책임을 돌리는 이 나라에 맹자의 왕도정치는 살아 있는가.

언제부턴가 이 나라에 ‘격노’라는 정치 언어가 만연하고 있다. 꾸짖어 바로잡는 의미의 질책이 아니라, 자기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부하의 의견을 듣지조차 않는 격노정치가 일상화되고 있으니, 우려스럽기만 하다.

한비자에서는 지도자가 자멸하는 원인 중의 하나로 충신의 의견을 듣지 않는 경우를 주목한다. 충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잘못된 가르침을 고집하면 쌓아온 명성을 잃고 웃음거리가 된다고 했다.
많은 인재를 등용했으나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자멸의 길을 간 향우와 자기보다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천하를 얻은 유방의 삶이 교차하는 늦은 봄날의 유월이다.

↑↑ 고아 강정숲
[사진 출처= 시인 조경래]

우리도 언젠가는 공원 벤치에 움츠린 그 중년 사내가 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지도자가 있다면 말이다.

권세를 무기로 삼아 자기 욕심을 챙기거나 술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측근의 편만을 들거나 함부로 급하지도 않는 공사를 벌이거나 가능성이 없는 일을 가능하다고 떠벌린다면... 일가친척의 비리를 모른 척하거나 잘한 일은 자기 덕으로 돌리고 잘못은 남 탓으로 돌린다면 말이다.  <장양호가 쓴 중국 고서 삼사충고 中에서>

민생이 어렵다. 불공정이 공정을 억압하고 있다.
그런데도, 당신의 탓이라고 지적하는 입들을 틀어쥐고 있다.
역사서 사기에서 춘추시대 말기 정나라의 명재상인 자상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무력으로 그들의 입을 막을 수는 있소. 그러나 이는 강물을 막는 것과 같소, 강물을 막으면 점점 불어나 강물이 둑을 무너트릴 것이오.”

“잘 살아!”
“그래, 당신도...”
그 거리에, ‘아빠!’를 붙잡는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나뒹굴고 있다. 딸을 부둥켜안고 떠나는 젊은 아낙의 어깨들이 들썩이고 있다.
어쩌면 머지않은 날, 찾아올지도 모르는 풍경들.
정부나 국회, 지자체의 지도자들이 ‘백성의 굶주림이 흉년 탓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그 낯선 풍경 속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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