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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새벽 칼럼․ 어느덧 14주기] 정치 명운 내걸고 구미 4산단 일으킨 박세직 전 국회의원

김경홍 기자 siin0122@hanmail.net 기자 입력 2023.07.11 13:00 수정 2023.07.11 13:06

‘자신을 위해 살려거든 정치세계에 기웃거리지 마라’



국민회의와 공동정부 구성한 자민련 전격 입당
김대중 대통령•김종필 총재 핫라인 활용, 백지화 위기의 4산단 조기 착공
4산단 착공식, 일정에 없던 김대중 대통령 참석케하는 기지 발휘
중앙 정치력의 위력 입증시킨 구미 출신 정치인
위기의 구미산단 일으킬 차세대 주인공은 누구⇥ 구미시민이 중견 정치인‧ 지도자 길러내야‘구미의 미래 보장’




↑↑ 1988년 서울에서 열린 올림픽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은 박세직 전 의원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서울올림픽 자료실]


[k문화타임즈=김경홍 기자] 세월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덧없음이다. 그러므로 삶의 자락에 남기는 흔적은 소중한 가치다.
2009년 7월 27일, 7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한 박세직 전 국회의원이 14주기를 목전에 두고 있다.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 돌아보면 새삼스럽다.

2003년 12월 15일 신장암으로 파란만장의 삶을 마감한 허주 김윤환 전 의원에 이어 6년 후인 2009년 박 전 의원의 영면에 들면서 구미현대정치의 1세대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로부터 14년이 흘렀지만, 많은 구미인은 때때로 그들의 세월을 추억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구미공동체 어디에선가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채취가 을씨년스런 가슴에 밀물지고 있는 탓이리라.

그렇다면 현대 한국정치의 중심에서 막강한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구미산단을 정상의 궤도에 올려놓은 박세직 전 의원은 구미에 어떤 족적을 남겼나.

이 나라 산업화의 상징인 구미산단은 지금, 호황기의 추억을 곱씹으며 길고 긴 침체의 터널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산단의 처한 현실의 중심에 서 있는 현직 정치인들의 어깨가 무겁다. 구미시민 역시 시대로부터 부여받은 의무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선거 때마다 중앙정치의 분위기에 휩쓸린 그들은 종종 현명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한 과오 앞에서 자류롭지 않기 때문이다.

◇ 일정에 없던 4산단 착공식에 김대중 대통령 참석시킨 정치력
취임 2개월 만인 1991년 서울시장직을 사직하고 1년 후인 1992년, 민주자유당 구미시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되는 것을 계기로 정치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박 전 의원은 그해 실시한 14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어진 1996년 15대 총선에서도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재선의원으로서 탄탄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1998년 4월 3일 송정동 모 한정식 식당에서 구미의 지역언론인들과 일정에 없던 오찬을 한 박 전 의원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혹시 말이야. 신한국당(미래통합당 전신)을 탈당하면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구미경제도 말이 아니잖아. 4산단 조성계획은 잡혀 있지만, 수년 때 한 발짝도 내딛질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야. 좋은 의견이 있으면 조언을 좀 해주게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날 오후 3시, 방송사는 ‘긴급 뉴스’로 ‘박세직 의원이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부총재의 자격으로 자민련에 입당했다“는 보도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날 지역 언론인들과 만난 박 전 의원은 이미 자민련 입당을 결정한 상태였고, 사전에 그 사실을 은유적으로 알렸던 것이다.

그 무렵 중앙정치는 요동쳤다. 같은 당 중진의 김종호 의원은 박 의원과 함께 자민련에 입당했다. 또 그해 6월 11일에는 자민련과 공동정부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국민회의로 구미 출신 박재홍 의원과 최기선 인천시장이 적을 옮겼다.

박세직 의원의 신한국당 탈당으로 구미 정가는 크게 술렁거렸다. 뜻을 같이한 주요 당직자, 도의원과 시의원들이 무더기 신한국당을 탈당해 자민련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미을의 일부 시의원과 정보호 도의원 등은 신한국당에 남아 있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

말을 갈아타면서 가는 길은 순탄치가 않았다. 보수 성향의 시민들을 중심으로 확산하는 비판 여론에 맞서 박 전 의원을 비롯한 탈당파들은 피폐화하는 구미공단 재건을 앞세우자며, 민심을 다독여 나갔다.

사실, 국민회의 집권 당시의 구미공단 사정은 나락(那落)으로 빠져들었다. OB 맥주 공장 광주 이전을 시작으로 비록한 공동화의 바람은‘굴뚝 연기가 솟아오르지 않는 황량한 구미산단’의 처참한 풍경을 그려냈다. 이러자, 시민들은 1996년 9월 30일 3공단 조성과 함께 계획만 수립한 채 요지부동인 4산단 조기 조성을 염원했다. 하지만 기존 산단이 공동화하는 상황에서 4공단 착공 바람은 과유불급이었다. 특히 수자원공사가 정부 차원의 획기적인 지원이 없을 경우 자력으로 4공단을 조성할 재원을 마련할 수 없다고 공언하면서 희망의 프로젝트는 백지화 위기에 내몰렸다.

이처럼 구미산단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자, 시민들은‘구미경제 살리기 비상대책위’를 구성해 가동했고, 자민련 부총재를 맡고 있던 박세직 의원은 당시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김대중 대통령의 핫라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4산단 조기 조성을 위한 수순을 용의주도하게 밟아나갔다.

이 과정에서 4산단 조성에 정치의 명운을 걸다시피 한 박 의원은 4산단 착공식 당일, 대구에 내려와 있던 김대중 대통령을 일정에 잡혀있지도 않던 착공식에 참석시키는 기지를 발휘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초, 4산단 착공식 당일 김대중 대통령은 대구 행사를 마치고 귀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세직 의원은 대통령 비서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종필 총재 핫라인을 활용해 일정에 없던 대통령의 4산단 착공식 참석을 성사시킴으로써 프로젝트가 탄력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을 깐 것이다.

박세직 전 의원을 보필했던 보좌진들은 지금도 종종 일화 한 토막을 이렇게 들려준다.
"하루 4시간 이상 잠자는 법이 없었다. 잠자는 시간은 곧 죽는 시간이라고 말씀하시던 그 분은 차량을 이용하는 동안에도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걸어 구미산단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하기에 바빴다“

박세직 전 의원의 정치 행보에 대해 일각에서는 입신출세를 위해 소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훗날 역사는 구미를 위해 살신성인하려고 했던 구미의 중심 정치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구미 현대정치의 거목인 김윤환‧박세직 전 의원은 평소 주변인들에게“자신을 위해 살려거든 정치세계에 기웃거리지 마라.”는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의 구미를 리더하고 있는 지도자와 정치인들은 과연, 선배 정치인의 남긴 고언을 가슴 깊이 들여놓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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