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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이 밝았구나. 이 할미 할아비는 섣달 그믐날부터 너희들에게 오려고 마음이 급했다. 일 년을 하루 같이 너희들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마음이야 한결같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한달음에 달려왔다. 해마다 서너 번을 오는데도 아파트는 어디가 어딘지 헷갈려서 찾기가 영 힘들더구나. 그래도 너희 할아비 꽁무니를 잡고 따라오면 할미는 걱정이 없단다.
현관 밖으로 너희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차례상을 진설해놓고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꽃을 피우고 있네. 우리가 너희들 바로 옆에 와 있는데도 몰라보다니……. 할미의 억지스러운 말에 너희 할아비가 날 꾸짖듯 눈을 흘기는구나. 가만히 들어보니 웃음보를 터지게 한 것이 타임캡슐이더구나.
작년 설날. 어미의 제의로 타임캡슐에 ‘올해의 우리 가족 목표’를 적어 보관했더랬지. 각자 목표를 정하기까지 서로 ‘감 놔라, 대추 놔라’ 말이 많기도 하더구나. 정해진 목표를 차례상에 올려놓고 차례를 지낼 때, 우리는 그런 너희들의 모습이 의아스럽고도 한편으론 흐뭇했단다. 스스로 정한 한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할 너희들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또한, 자신과의 약속들을 일 년간 어떻게 이행할까, 우리는 참으로 궁금했단다.
작년 추석에 중간 점검을 하더구나. 새해에 세운 목표를 잊고 지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추석 차례상 앞에서 타임캡슐을 열고 재확인을 하더라. 그때 효민이는 토라지더구나. 새내기 대학생활에 정신없이 지내다가 목표로 정해 놓은 것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었지. 아비의 잔소리에 홱 돌아서서는 어미에게 이런 것을 괜히 정해서 잔소리 들었다고 하였지. 그래도 이것으로 자기의 생활을 반성하게 되고 다시 더 나아갈 계기가 되지 않겠니.
아비는 처음에 목표를 정할 때부터 우리가 알아봤다. ‘로또 1등 당첨, 10억 만들기, 몸무게 10kg 감량’이라는 목표를 정하고 한 가지도 이룬 것이 없더구나.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너무 허무맹랑했다. 세 번째 목표는 일 년간 노력했으면 10kg 감량은 무리더라도 그에 근접했을 것인데, 아이들을 혼낼 처지가 아니더구나. 하지만 아비가 가정을 잘 꾸려가는 모습이 늘 든든하고 대견스럽다.
어미가 처음 인사 올 때가 생각나는구나. 아비가 순둥이 같아서 늘 걱정이라 좀 당찬 처자가 들어왔으면 했는데 오십보백보라 여겼다. 그런데 외며느리의 역할이나 자식을 낳아 기르는 정성이나 가정생활 전반에 나무랄 데가 없더구나. 이번에도 기발한 생각을 해냈더라. 가족들에게 한 해의 목표를 정하게 하고 그것을 이루도록 동기부여를 한 것에 박수를 보낸다. 꼭 목표 달성을 해서라기보다 그것을 향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새끼들 한 번 안아보자꾸나. 큰 손녀 효민이는 이제 대학 2학년이구나. 한창 멋 부릴 나이지. 처자 티가 나는 것이 시집보내도 되겠네. 둘째 효진이는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간다지. 많이 힘들겠구나. 언니보다 키도 크고 곱상한 것이 남학생께나 줄을 서겠구먼. 두 녀석 다 어째 살빼기가 한 해 목표냐. 요즘 처자들은 매스컴 탓인지. 비쩍 마른 말라깽이가 못 되어 안달이니 원! 지나가는 강생이가 뼈다귀인 줄 알고 따라오겠더라. 우리 새끼들은 좀 통통하게 살이 올랐으면 좋겠구나. 젊음과 건강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고 하지 않더냐.
우리 막둥이 준우 한번 업어주고 싶구나. 어릴 적 눈만 새까맣게 반짝거리던 녀석이 언제 이리 많이 컸노. 백일 지나고부터 우유를 먹질 않아 어미가 애를 태우더니 이제 어깨가 벌어지고 덩치가 실한 것이 많이 크겠다. 어미 아비가 늘 안 큰다고 걱정이던데 걱정일랑 붙들어 매라고 해라. 오죽했으면 우리 새끼가 한 해 목표를 키 많이 크기로 정했냐. 키에 대해서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라. 내년이면 쑤욱 커서 누나들 키 따라잡고도 남겠다.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실랑이할 것 없다. 일 년 만에 나타나는 결과가 뭐 그리 중요하겠니. 이것을 계기로 십 년 후의 목표를 잡을 수도 있고 나아가 이십 년, 삼십 년 후 자신의 모습을 그려서 적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구나. 눈앞에 바로 드러나는 것에 만족하기보다 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을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바람이 있다면 너희들이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늘 여유를 잃지 않는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면 한다.
생전 못한 잔소리를 오늘 다하는 것 같구나. 이 할미 할아비의 마음이라고 여겨라. 우리 새끼들 한번 품어보지도 못해서 미안하구나. 할미 할아비 정도 모르고 커 온 너희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린다. 그래도 늘 너희들 곁에서 한 시도 떠나지 않고, 어루만지고 걱정하고 잘되기를 바라고 있단다.
전해 오는 풍습으로 *청참(聽讖) 이라는 것이 있다. 할미 할아비는 길조인 까치의 지저귐보다 현관 밖으로 새어 나오는 너희들의 웃음소리가 더 좋더라. 새해마다 연례행사처럼 타임캡슐을 열어보며 깔깔대는 소리를 상상만 해도 마음이 즐겁다.
*설날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가, 처음 듣는 짐승의 소리로 한 해의 운수를 점치는 것.
이복희 작가(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