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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위 왕산 선생 [사진=왕산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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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걸쳐 14명의 독립운동가 배출
허위, 허훈, 허겸, 허형, 허필, 허종, 허학, 허영, 허준 허국, 허발, 허규, 허형식, 허은
4대 걸쳐 9명의 독립투사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 이상룡 선생 집안과도 무관치 않아
허위의 손녀 허은,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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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 임오동 왕산기념관 [사진=왕상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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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김경홍 기자] 구미의 왕산 허위 선생은 3대에 걸쳐 1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대한민국 최고의 노블레스 오블리즈 명문가’이다.
왕산 집안은 특히 노블레스 오블리즈 명문가로서 4대에 걸쳐 9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인 이상룡 선생이 집안과도 무관치 않다. 2018년 8월 15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허은 여사가 1922년 안동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해 지내다가 1932년 환국해 안동 임청각 3대 종부로서 안살림을 맡기도 했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명문가인 왕산 집안은 구미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명예, 부를 가진 사람에겐 걸맞은 도덕적 책임과 사회적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다.
일제강점기 36년간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나선 왕산 집안을 ‘대한민국 최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명문가’로 칭하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무려 3대에 걸쳐 1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왕산가의 애국심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왕산 허위 선생(1855년 4월 2일~1908년 10월 21일)은 구미시 임은리 출신으로 평리원 재판장(대법원장), 비서원 승(대통령 비서실장), 의정부 참찬 등의 관직에 재직했다.
선생은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이 강탈당하자, 의병을 모집해 13도창의군을 창설했고, 의병총대장으로 1907년 일본의 심장부인 조선통감부를 공격하기 위해 선발대 300명으로 서울진공작전을 펼치고 이를 진두지휘 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서울시는 왕산선생의 13도창의군 선발대가 조선통감부를 치기 위해 진군한 청량리에서 동대문 간의 도로를 '왕산로'로 명명했다.
선생은 1908년 일본헌병에 의해 체포돼 투옥되었고, 같은 해 10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재산과 높은 관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공로를 인정해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대한민국장 수훈자는 민간인으로서는 왕산 허위, 안중근 의사 등을 비롯한 28명이다.
왕산 선생의 일가도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선생의 형제 허훈, 허겸은 모두 의병장을 지냈고, 아들 허학, 허영, 허준, 허국 및 4촌 형제 등 14명도 모두 의병투쟁에 적극 나섰다.
이들은 특히 독립운동기지 건설 참여, 군자금 모금, 독립운동 세력 후원 활동을 전개했다. 왕산 허위 선생의 가문은 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서울), 석주 이상룡선생 가문(안동)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독립운동 가문으로 손꼽힌다.
안중근 의사는 “높은 벼슬아치들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를 모르는 자가 많다. 그러나 왕산, 그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을 만큼 선생의 의병활동과 나라사랑 정신은 안중근 등에 의해 계승되었고, 이후에도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편, 구미시는 왕산기념관을 설립하는 등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선양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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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 [사진=왕산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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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훈]허위의 맏형이다. 1936년 4월 14일 선산군 하고면 임은리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조주 허임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22세인 1857년 향사에 합격했으나 복시에서 낙방하자,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경전 연구에 몰두했다. 성호학파의 실학을 배우기도 했다.
198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도를 피해 진보현 북면 흥구리(지금의 영양군 입암면 흥구리)비봉산 아래로 이주해 은거했다. 1985년 막내 동생 허위가 경상북도 진보군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경상남도 김해군 우부면 내리(지금의 김해시 내동)에 있던 자신의 전답 3,000여 마지기를 매각해 대금 전액을 허위에게 군자금을 제공했다.
1896년 4월에는 안동부 진보군 하리면 읍내동(지금의 청송군 진보면 관덕리) 진보향교에서‘진보의진’의병장으로 추대돼 안동군·영해군·청송군·영양군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고종의 해산 조칙(명령, 훈령)으로 해산해 낙향, 진보군 하리면 읍내동에 남덕정을 짓고 은거했다.
1907년 도산서원 및 병산서원의 원장을 지내다가 그래 8월 23일 진보군 하리면 읍내동 남덕정에서 사망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허겸]허위의 형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해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고, 을사오적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경에게 체포됐다. 이후 4백여 명을 규합해 경기도 연청 등지에서 활약했다.
1912년에는 만주로 망명해 김동삼, 유인식 등고 함께 중어학원을 개설해 한중 친선 및 한족의 이익을 도모하는 활동을 했다.
특히 합화현에서 부민단을 조직해 초대 단장에 취임한 그는 남만주 일대에서 이주한 개척농민의 자치기관으로서 애족, 구국운동 사업을 전개하는 등 광복운동에 기여했다. 1968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허학]1887년 경상도 선산도호부 하고면(지금의 구미시 임은동)에서 허위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 부친 허위가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21세에 참가해 의병 2천 명을 거느렸다. 이후 의병장들에 대한 연락과 무기조달을 위해 잠복 활동했다.
1913년 9월 임병찬, 이인순, 전용규 등과 함께 독립의군부 사건의 주모자로 활동하다가 1914년 5월 54명과 함께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중부 허겸을 따라 만주로 망명해 동화학교를 설립했다. 1920년 일본군에 의해 간도 참변을 당하자, 종숙 허형, 허필과 함께 서간도를 떠나 일제 탄압이 미치지 않는 북만주로 이주했다.
1925년 신민부가 창립되자, 원로들로 구성한 참의원에 선출됐다. 1934년 허학은 일제 관헌의 비밀문서인‘국외에 있어서의 용의조선인명부’에 ‘남만주 군정서원으로서 부독판 여준과 연결되어 있다’며 요시찰 대상이 됐다.
1940년 9월 28일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한 그에게 정부는 1968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허종]허훈의 장자인 허숙의 아들이다, 종조부 허겸과 신민회 회원으로 가입해 대구에서 활동했다.
1920년 9월 결성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에 가입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2년 체포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08년 5월 체포된 허위가 10월 순국하자 허위 일가의 국내활동이 불가능하게 됐다.
결국 허의 가족인 제수와 네 아들 및 두 딸을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허형]허형(1843년~1922년)응 허희의 장자이며, 허필의 형이다. 아들 허발과 허규는 모두 독립운동에 나섰다.
을사조약 이후 오적 암살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1906년 3월 오적 암살을 모의하다가 거사 계획이 드러나 검거된 사건이다.
1915년 아들 허발과 허규, 동생 허필의 가족과 함께 도피해 서간도에서 종제 허겸 및 허위의 가족과 합류했다. 1920년 북만주로 이주했고, 1922년 10월 3일 80세로 서거했다. 묘소는 만주 목단강 사도구 사선산에 있다고 전해진다.
[허필] 허희의 차남이며, 허형의 동생이다. 차남 허형식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 항일유격대 제3로군 총참모장 및 북만성위원이었고, 삼남 허구식은 형 허형식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허필은 허위의 의병항쟁에 적극 가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20년 일본의 간도 출병 직후 허필은 종형 허겸과 허위의 유족, 그리고 형 허형 등과 함께 서간도를 떠나 북만주로 이주했다.
1920년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한약방을 열어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했다. 1932년 서거한 허필의 묘는 하얼빈에 있다.
[허발]허형의 차남이다. 허위의 의병투쟁에 가담했다. 1919년 3.1운동에 남북만주에서 확산하자, 남만 대표로 국내에 잠입했다가 1933년 대구경찰서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가 경영하던 일창한약방은 독립운동의 연락처였다.
이상룡, 김동삼, 안중근, 안경학 등과 친교가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묘소는 대구 신암동 선열공원에 있다.
[허규]허형의 삼남이며, 허발의 동생이다. 종숙 허위가 창의한 격려문을 배포하는 활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1919년 3.1운동 때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5년 대한광복회 사건을 꾀하기도 한 그는 김규식, 김구, 안재홍 여운형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192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다가 체포돼 경성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가석방된 그는 이후에도 비밀결사 사건으로 서울 왕십리에서 체포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4년 8월 10일 서울에서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의 상임지도부에 추대됐다. 이 조직은 일제 말기의 탄압에 저항해 여운형 등이 만든 민족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연합한 비밀결사이다.
1945년 해방되자, 건국준비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참여했고, 1946년 관선의원이 됐다. 특히 김구와 통일 조국을 위해 노력했으나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정계와 관계를 끊고 대구로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1957년 서거한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평에 있다.
[허형식] 허형식(1909~1942)은 허필의 차남이다.
1929년 중반부터 중국 공산당 북만특위 및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동했다. 1930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입당한 후 북만주의 한인 농민들을 위한 대중사업 전개, 1930년 후반에는 대중운동을 하다가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돼 공산분자라는 협의로 수감되었다가 1931년 석방됐다.
1933년에는 항일유격대 창건을 지원해 1,400여 명의 회원을 결집했다. 1933년 10월 주하얼빈 유격대가 창건되자, 항일 유격대를 지원했으며, 1934년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 제3대대 정치지도원, 이후 제1대대장에 올랐다.
1938년 6월에는 동북항일련군 제3군 제1사 사장으로서 해륜과 경안현 등지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1942년 7월 말 소분대의 활동을 지원하다가 그해 8월 3일 경성현 청풍리에서 만주국 토벌대에 포위돼 격전을 벌이다가 33세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