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동 허위·인동 장진홍·봉곡동 박희광 선생→
후손, 지역민의 노력으로 살아있는 역사로 부각시켜
원평동 김정술·옥성면 육홍균·선산읍 김동석과 김우동, 고아읍 신준원 선생→노력 미흡, 잊힌 역사로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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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구미시 원평동 [사진=구미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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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발행인 김경홍] 역사적 사실은 바르게 조명해야 한다. 그릇된 것은 바르게 잡아야 하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한 과거의 자취는 살아있는 역사로 부각해야 한다. 후세들에게 부여된 절대적 책무이다. 그래야만 역사가 과거로의 후퇴를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지 않겠나.
일제강점기 36년간 수많은 항일투사는 일신 영달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이 나라의 독립과 해방된 국가에서 국민이 누릴 행복을 위해 몸을 바쳤다. 수많은 지식인이 친일파로 돌아앉아 사랑방에서 호의호식을 하는 동안 항일투사들은 일회성의 생명을 내건 ‘낭떠러지의 삶’을 견뎌내며 일제와 맞섰다. 그들이 지향했던 것은 만민의 행복주의였다. 그러므로 민주화된 나라에서 행복을 누리는 후세는 몸을 바친 항일투사들의 길을 반드시 조명해야 한다.
구미에는 적잖은 항일투사들이 있다. 하지만 많은 구미시민은 임오동 허위, 인동동 장진홍, 봉곡동 박희광 선생 등 몇몇만을 기억할 뿐이다. 이들 3명의 항일투사가 부각된 이면에는 출신지 지역민과 집안 등 후손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례로 왕산 허위는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그 업적이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허호 전 시의원과 허복 현 도의원을 비롯한 허씨 가문과 임오동 지역민의 의기투합한 결과 왕산 허위를 살아있는 역사로 안착시켰다.
박희광 선생 역시 다르지 않다. 자녀들은 물론 박씨 문중과 선주원남동 지역민들의 노력에 힘입어 항일업적이 계승 발전되고 있다.
장진홍 선생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어서 거론하는 항일투사들도 후손과 집안, 출신지 지역민이 중심이 돼 살아있는 역사로 부각할 수 있도록 노력하길 기대한다.
대구고등보통학교(대구고보/ 현 경북중고고)에 재학 중이던 원평동 김정술 선생은 장진홍 선생이 주도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쓰인 사제폭탄 제조의 중심인물이다. 아들 김구식 선생을 중심으로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한 노력에 나서고 있으나, 가시화되지 않으면서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1948년 5월 31일부터 1960년까지 번갈아 가며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선산(구미)정치를 이끈 옥성면 육홍균·선산읍 김동석·김우동, 고아읍 신준원 선생도 항일투사 출신이다.
특히 정치적 격변기에도 불구하고 김동석·신준원 선생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자유당을 거부하고 무소속의 길을 갔다.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옥성면 육홍균 선생은 수원고등농림고(현 서울대 농대) 일본 니혼대학 법학과를 중퇴했다. 농민운동을 주도하다가 1939년 4월 선산 경찰서에 검거돼 1년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의병운동, 독립운동가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그러나 3대 선거에서 자유당으로 출마하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4대 의원을 지낸 김동석 선생은 일본 도쿄 제일외국어학교를 수료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송금과 비밀잡지 근우 간행에 가담하는 등 항일 운동을 펼쳤다. 자유당 입당 권유를 뿌리치고 세 번에 걸친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을 견지했다.
오상학원을 설립한 그는 김윤환‧ 김태환 의원의 부친이다. 훗날 한국 정치사에 조병옥, 김대중과 함께 삼부자 국회의원 3대 가문의 기록을 남긴 주인공이다.
3대 의원을 지낸 선산읍 김우동 선생은 정치적 경쟁 관계였던 신원준과 구미소비조합을 결성해 항일 운동을 이어갔다. 선산중·고를 설립한 초대 이사장 출신이다. 이후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를 국가에 헌납했다.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김덕 전 안기부장의 부친이다
5대 의원을 지낸 고아읍 신원준 선생은 1919년 3월 13일 선산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투옥됐다. 이후 니혼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그는 일본에서 박열 등과 함께 아나키즈(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귀국 후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다가 투옥됐다. 박상희, 김우동과 함께 구미소비조합을 조직하는 등 지역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두 번에 걸친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을 거부하고 무소속의 길을 갔다. 묘소는 고아읍 이례리에 있다.
2022년 초, 신준원 선생의 손녀가 구미시청을 방문해 독립운동 업적 발굴을 요청해 안타까움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