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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9대 구미시의회, 비극적인 아픔 추모한 ‘역사적인 의회’로 기록되길 기대한다

서일주goguma1841@naver.com 기자 입력 2026.06.21 13:47 수정 2026.06.21 21:41

6·25전쟁 형곡동 희생자 위령탑 앞에 머리 숙인 ‘유종의 미’
역사의 기록에 원년으로 남길



↑↑ 구미시 형곡동 형곡전망대 아랫쪽에 소재한 6·25전쟁 형곡동 희생자 위령탑
[사진=K문화타임즈]


[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발행인 김경홍] 6월 22일 9대 구미시의회가 제2차 본회의를 끝으로 마지막 회기를 종료한다. 대의기관인 의회는 주민의 희로애락과 함께해야 하는 책무를 위임받은 ‘주민의 입이면서 손과 발’이다. 따라서 의회는 주민이 겪는 아픔과 심정을 함께하면서 꺼진 어깨들 다독여야 하는 책무를 부여받고 있다.

구미시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참극은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8월 16일 시무실, 지금의 형곡동에서 발생한 미군 오폭사건이다. 폭격기 편대의 폭격으로 지역 주민과 피난민이 거주하고 있던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많은 주민과 피난민들이 집단 떼죽음을 당하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한 집안이 전부 몰락된 경우가 허다했다.
2009년 7월부터 8월까지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관을 파견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희생자 130여 명에다 부상자가 수백 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원혼을 진혼해 달라는 유가족과 지역 주민들의 눈물어린 호소로 ‘6·25전쟁 형곡동 위령탑추진위원회’가 설립된 것은 2012년 4월 30일이었고, 장소 선정 등 4년여의 진통을 거친 2016년, 시비와 도비의 지원을 받아 위령탑이 건립됐다.
우여곡절 끝에 위령탑이 건립될 당시 추진위원회는 매년 6월마다 구미시와 구미시의회 등 공공기관이 정례적인 추모 의례를 갖춰달라고 호소했다. 또 교육계를 향해서도 두 번 다시 6·25의 참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위령탑을 안보교육의 장으로 활용해 달라고도 했다.

하지만 위령탑 건립 이후 10년이 흐른 지금까지 구미시나 의회, 정치권이 공식적인 추모 의례를 지낸 사례는 없었다. 이러다 보니, 교육기관이 주도하는 안보교육의 장으로의 활용 역시 기대할 수 없었다.
피해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위령탑 건립과 함께 매년 6월마다 공식적인 추모의례를 지내는 유사한 사례의 여러 지자체와 비교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을 적대시하기 위해 이념적, 정치적으로 접근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민주수호를 위해 자국민을 희생시키면서까지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대응은 우리로선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비명에 간 혼령들을 위한 진혼의 노력은 후세들이 지켜야 할 양심적 도리이다. 따라서 구미시와 의회가 진혼의 대열에 앞장서야 하는 것은 역사적인 책무이기도 하다.

9대 구미시의회 회기가 마감되는 6월 22일은 6·25전쟁 76주기를 사흘 앞둔 시점이다. 비극적인 아픔을 추모한 ‘시민의 의회’, 그 원년의 역사를 쓰는 것은 아름다운 발자취다.

*6·25전쟁 형곡동 희생자 위령탑에 써 내린 기록
무릇 동서고금의 역사를 회고해 보건대 국운의 흥망으로 각 나라마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운이 흥성했을 때 각 민족은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고, 그것이 쇠퇴했을 때 몰락과 파탄이란 비극을 겪어야 했다. 우리 민족이 지나온 길도 이 도도히 흘러가는 세계사의 물결 앞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특히 우리 민족사의 경우는 국운의 융성으로 인한 기쁨보다, 내우외환에 의한 쓰라린 슬픔이 더 많았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멀리까지 회고하지 않더라도,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난과 상처를 안겨다 준 현대사의 한 부분 6·25동란을 우리 모두는 아픈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동족상잔의 비극은 말과 글로써 어찌 다 형언할 수 있으리오. 이제 와서 형곡동의 슬픈 한 역사의 토막을 떠올리게 되어 만시지탄의 비통함을 느낀다. 동란 당시 형곡동에서 일어난 처절한 집단 참상과, 그로 인한 위령탑 건립에 관한 내용이다. 당시 형곡동은 궁핍한 시골 산촌으로 마을 주민 모두가 농사만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시운이 불행하여 이 마을에 갑자기 짙은 음영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동란이 발발되던 그해 여름, 이 마을에 특수한 지형(형곡동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외딴 마을이라 피난하기에 알맞은 지형임)으로 인해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만호처럼 이곳으로 밀려 들어와 목숨을 부지하던 터였다. 마을의 토착민과 피난민들은 들여오는 포성에 숨죽이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든 어느 날 비극의 흑운은 이 마을 전체를 온통 뒤덮기 시작했다.

때는 1950년 8월 16일(음:7.2) 오전 11경이었다. 기체 불명의 폭격기 몇 개 편대가 수 시간 동안 이 마을을 맹폭하는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고, 아비규환의 처절한 참상은 아무리 통곡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폭격이 끝난 직후, 다시 제트기 몇 대 편대가 마을을 향해 또다시 기관포 사격을 가해와, 수많은 주민과 피난민들이 집단 떼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 집안이 전부 몰락된 경우도 있었으며, 마을과 인근 산야가 벌집 쑤셔 놓은 듯 참혹했다고 전한다.

더욱이 이 피폭자들은 무장한 군인이 아니라 모두가 순수한 민간인뿐 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사망자의 경우 동사무소에 공식 신고댄 형곡동 사람만 130여명(당시 리장 김경환 증언) 이라고 한다. 난리 중의 급박한 정황으로 보아 미처 신고 되지 않는 사람까지 고려하면 사망자 수는 통계적으로 기록되지 않아,

이 사실까지 고려한다면 수는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새 전쟁이 끝나고 포성이 멈춘 지 65년여의 세월이 흘러갔다. 눈물도, 슬픔도 모두가 망각의 저 편으로 조금씩 사라져갔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형곡동의 뒷산에는 올해도 온갖 야생화와 진달래꽃이 아름답게 피었다 지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그날의 끔찍한 참상은 이 마을 주민 모두의 가슴 속에 단근질 자국처럼 아프게 새겨져 있으리라. 사람의 피가 흐르는 이상, 어찌 비명횡사한 부모, 형제, 친지들의 참상을 잊을 수 있겠는가? 미물도 제 어미와 새끼를 잃으면 슬피 울거늘, 항차 사람인 저희야 얼마나 각골통한의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왔겠는가?

이제 당시 폭사 되거나 몰살된 마을 희생자들에 대하여 그 넋을 위로하고져 뒤늦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생각은 다름아닌, 비명에 간 혼령들을 위해 진혼의 위령탑 설립에 관한 사항이다. 이 위령탑의 건립은 단순한 치장이나 장식이 아니라, 유가족 모두에게 절실한 문제다. 역사는 흘러가도 그 교훈은 남는다.
만약 이 탑이 세워지게 된다면 그것은 진혼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란을 경험하지 못한 후세의 자손들에게도 소중한 교육적 가치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6.25사변(형곡동의 참상)의 그늘 속에 망각되어 왔던 유가족들의 아픈 상처가 조금이나마 위로되고 치유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끝으로 한국전쟁기인 1950년 8월 16일 경북 구미시 형곡동에 양민들에게 가해진 미군 오폭사건에 대해서는 92년부터 국가기관을 또는 정부를 상대로 하여 18년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진실규명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구미시의 도움으로 2012년 4월 30일 형곡동 위령탑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4년여의 진통 끝에 위령비 건립 사업을 위한 추진을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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