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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희 수필집· 연재] 내성천에서는 은어도 별이 된다 (16) 동행, 나의 화초 사랑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입력 2026.06.18 18:38 수정 2026.06.18 18:42

시인 수필가 이복희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베란다로 향한다. 주인의 눈길을 기다리는 화초들과 아침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오늘은 여린 이파리 사이로 분홍 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 사랑초에게 눈길을 먼저 보낸다. 어제까지 앙다문 입술로 절대 속내를 보여주지 않을 것 같더니,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앙증맞은 다섯 개의 꽃잎을 활짝 벌리고 환하게 웃고 있다. 수줍은 듯하면서도 화사한 미소를 보여주는 사랑초와 눈 맞춤으로 하루를 설레는 마음으로 연다.

언제부터인가 베란다에 화초가 하나둘 늘었다.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 두고 가지가지 화분들로 넘쳐난다. 더는 화초를 늘이지 말라는 남편의 엄포가 떨어졌다. 요즘 들어서 나도 관리하기에 버거울 만치 화초 식구들이 느는 바람에 고민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하나하나 들여올 때나 키울 때나 저마다 사연들이 담겨 있어서 예사로이 여겨지지 않는다. 이 꽃은 이래서 좋고, 이 나무는 저래서 예쁘고, 저 춘란은 요래서 사랑스러워 화초마다 나름 아끼는 이유가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화초들과의 교감에서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 생전에 어머니가 그랬듯이 화초들에도 말을 걸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화초를 보고 예쁘다고 하고, 새로운 촉이 돋아난 화초에는 수고했다고 격려를 해준다. 때론, 지긋이 바라만 보고 있어도 흐뭇하다. 꼭 말을 주고받아야만 대화가 되고 소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사이라고나 할까. 사람과 사람과의 면대면 만남에서 정을 나누듯이, 식물과의 무언의 대화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끈끈한 정이 흐른다.

얼마 전, 손바닥 닮은 천년초 선인장을 화장품 가게에서 데려와 베란다에 두고는 잊었다. 가게 주인의 훈훈한 인심까지 담아 신문지에 둘둘 말아온 것인데, 다른 물건들을 정리하느라 그만 깜박 잊고 말았다. 며칠 후, 쓰레기인 줄 알고 버리려다 펼쳐 본 신문지 속에 되똑하게 누운 천년초를 발견했다. 원줄기에서 꺾일 때부터 잔뜩 긴장했을 텐데, 선인장을 그냥 내버려뒀으니 새 주인을 얼마나 원망했을까.

모래바람 날리는 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신문지 속, 천년초의 발버둥을 보았다. 실같이 뻗은 뿌리가 물 한 모금을 찾아 허공을 향해 내디디고 있었다. 천년초는 제 살길을 찾아 떠나려 하는 것인가. 살을 비집고 나온 촉수 같은 가시를 안테나 삼아 누군가에게 구조 요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건망증이 심한 새 주인 원망했을 독기 품은 가시를 다독여가며, 토기로 된 화분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줬다.

천년초를 화분에 곱게 심고 주기적으로 물을 주어도 좀체 싱싱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여름 내내 고개를 떨어뜨리고 축 처진 모습이라 볼 때마다 애를 태웠다. 여름이 다 가도록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앞줄에 놓였던 천년초 화분의 자리가 뒷줄 구석으로 밀려나고, 관심에서 차츰 벗어났다. 꽃을 피우고 새순을 올리는 다른 화초들에게 마음자리를 내주고 천년초는 뒷전이었다.

그러구러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날 화초들에게 물을 주면서 눈길이 천년초에 멎었다. 천년초에 이상한 뿔이 솟아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같이하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천년초가 귀엽고 자깝스런 새끼를 친 것이다. 한동안 시들했던 이유가 몸피를 줄여가면서 새 생명을 틔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천년초를 돌보는 일을 뒷전으로 미웠으니, 아직도 나는 화초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말해도 할 말이 없다. 화초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있다고 화초를 잘 키우는 것이 아니다. 화초의 생태에 대해서도 잘 알고 가꾸어야 화초를 키울 자격이 있다.

화초와 교감이라고 할까, 화초를 키우다 보면 이들을 보는 마음이 생긴다. 화초는 사람이나 동물처럼 소리를 내거나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원하는 것이 있거나 문제가 생기면 사람에게 신호를 보낸다. 대부분 사람이 화초가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는 “우리 집에는 화초가 잘 자라지 않는다.”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사람이 몸이 좋지 않으면 안색이 변하듯이, 식물도 어딘가 좋지 못하면 잎의 색깔이 변한다. 식물도 살아있는 생명체다.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과 관심으로 자라듯이, 화초도 주인의 정성으로 자라고 예쁜 꽃을 피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꽃을 보면서 기쁨과 위안을 얻는다. 그러고 보면 사람과 화초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로, 사람과 화초와의 ‘필연적 동행’이라고 비유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정일근 시인의 「쑥부쟁이 사랑」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른다. “이름 몰랐을 땐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소개한 시처럼 산을 오를 때나 들을 거닐 때, 이름을 알고 있는 꽃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치 그 꽃들이 내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사람들 사이에도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다는 것은 그 사람에 관한 관심 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남향인 우리 집 베란다에는 오후 늦게까지 햇살이 든다. 화초들은 내남없이 햇살 따라 고개를 내민다. 사랑초 꽃잎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햇살이 또르르 굴러 천년초 새순에 걸터앉는다. 햇살을 품은 천년초의 새순이 부쩍 자라 보인다. 머잖아 천년초가 앙증맞은 꽃을 피워 올리지 않을까 은근히 기다려진다. 이렇게 화초들과 사랑의 나누는 나의 동행은 늘 기다림의 연속이다.


이복희 작가(시인 수필가)⇁⇁⇁⇁

 

경북 김천 출신이다. 2010년 ‘문학시대’에 수필, 2022년 계간‘시’에 시가 당선되면서 한국 문단에 명함 (수필가·시인)을 내밀었다.
시집으로 ‘오래된 거미집’, 수필집으로 ‘내성천에서는 은어도 별이 된다’를 출간했다.
릴리시즘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는 평을 얻는 작가로 경북 구미와 경기 동탄을 오르내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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