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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식 본부장 |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 길’은 건너야 할 길목이다. 떠나가는 이 전 총리를 그리워하는 김 본부장의 글귀에 보이지 않는 눈물이 묻어난다. 그러니, 누구든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할 일이다.
恩義(은의) 廣施(광시)요, 人生何處不相逢(인생하처불상봉)이다.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어라. 어느 곳에 살든지 한번은 서로 만나지 않으랴. 그리고 헤어지지 않으랴”
[SNS 전문]
이해찬
나와는 특별한 관계였던 사이다.
1980년대 초, 모종의 사건으로 계엄하에 특전사에서 군법에 의해 몇 년을 받아 일반 교도소로 이감된 나는 경북 안동시 신세동 100번지 안동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의 책임을 맡고 있는 지도반장으로 있을 때이다.
어느 날 새벽 거물급 재소자가 이감을 왔다. 그가 바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징역 7년을 받고 온 이해찬이었다. 빡빡머리에 눈빛이 형형해 당시의 모습이 지금도 느껴진다. 재소자 번호 60번의 패찰을 내 손으로 직접 건네주고 독방을 안내했다.
당시 지도원은 부족한 교도관을 보조하는 보안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독보권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이해찬 씨는 이감 다음날부터 전두환 정권에 투쟁하는 투사로 변해 안기부에 동향 파악의 주인공이 됐고, 나는 60번 이해찬을 담당하는 지도반장으로 본의 아니게 친해지게 됐다.
매일 운동시간에 테니스를 함께 치고 애로 사항을 풀어주는 일을 맡아 요구하는 책과 아내와 지인들의 서신을 검색 하눈 등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와의 깊은 사연의 주인공이 됐다. 특별 면회를 온 당시 돌베개 출판사 대표였던 부인 김정숙 씨도 그때 알게 됐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그는 원주 교도소로 떠났다.
그와의 재회는 수년이 지난 후 서울 관악구에서 평화민주당 국회의원 후보로 만났다. 당시 거물 김수환 의원을 상대로 승리한 순간을 곁에서 보았다. 나보단 나이가 적었지만, 사석에선 친구같이 지낸 그 시간이 새롭다.
당시 의원회관 위층엔 나의 할아버지 항열인 허주 김윤환 의원이 있었다.
이해찬 의원 왈
“김사장 할부지는 너무 잘생기시어 영화배우 하시면 좋을 건데...,”라는 농담을 해 웃기도 했다.
이젠 볼 수 없는 먼 길을 떠나버렸지만 잠시 돌이켜 보는 그 시간이 그립다.
그곳에선 이념도 다 버리고 영면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