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 =발행인(시인 소설가) 김경홍] 뜨거운 햇살이 자취를 감췄다. 그것들이 해코지하려고 덤벼들던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세월도 빠르고 흐르는 세월 따라 허겁지겁 생로병사의 비탈을 오르내리는 여정도 빠르다. 그게 살아감의 순리지만, 많은 이들은 이겨낼 수도 없는 순리와 종종 맞선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고, 알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일상의 반복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 틀 속에 갇혀 살아간다. 무지요, 죄이다.
틀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들이 틀 밖으로 밀어낸 어려운 이웃들. 누군가는 소외 이웃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복지정책가는 차상위 계층이라는 이름표를 매달아 준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도움을 받는 사람들, 우리가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마치 기생寄生동물로 전락한 사람들. 내가 아는 붕어빵 아줌마도 그 부류 중의 한 존재다.
뜨거운 햇살이 자취를 감추자, 올해도 그 아줌마는 햇살이 할퀴고 간 리어카를 꺼내 들었다. 마치 유모차의 아가를 들어 올려 끌어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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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작가 조경래. 재판매 및 DB 금지. 2025.9.20=k문화타임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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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가을밤, 식탁에 포근함 저녁이 내려앉았다. 노을길을 걸어온 소녀와 옛날 통닭을 들고 온 아빠, 깨알 같은 말씨들을 식탁에 흩뿌렸다.
다소 피곤한 소녀의 어깨를 다독이는 아빠, 아름다운 꿈을 가꾸고 있을 얼굴에 미소가 시냇물로 찰랑거렸다. 그들의 관계를 살며시 밀치고 들어선 엄마, 식탁에 턱을 괴고 앉은 얼굴이 미소를 피워올렸다.
며칠 후 압류딱지가 들이닥쳤다. 새벽길을 밟은 아빠의 취기가 마룻바닥에 아주 낮게 무너졌다. 문틈 새로 흘러나온 엄마의 흐느낌이 아빠를 일으켜 세웠다. 이불을 뒤집어쓴 소녀, 손등에 눈물을 뿌렸다. 현관문을 비집고 흘러든 코로나의 물살은 그날 새벽 아빠를 거리의 외곽 어디론가 밀어냈다.
낡은 리어카가 무너져 내린 단풍을 밟았다. 클랙슨이 울려대는 대로, 아슬하게 건너온 리어카가 뒷골목 어둠 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 엄마가, 많이도 야윈 아줌마의 손이 붕어빵을 만들어냈다. 산길을 가쁘게 걸어온 싸늘한 바람이 이파리를 떨궈내기 시작했다. 붕어빵을 만들어내는 아줌마의 손이 바빴다.
추워야 사는 사람들, 엄마도 어느새 그 세상의 주민이 되어 있었다.
어느덧 그 세상에 입주한 지 3년이다. 오늘도 아줌마는 그 세상 속에서 꺼내든 리어카를 손질하고 있다.
소설 속의 얘기가 아니다. 현장 속의 얘기다. 한 달여 후면 차츰 차가워지기 시작한 세월은 첫눈을 뿌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눈길을 밟고 잠의 세상으로 걸어 들어간 밤늦게까지 붕어빵을 만들어낼 것이다.
경기가 어려우면 있는 이들은 축적된 부의 높이를 더 높이지 못해 야단이고, 없는 이들은 세끼니를 이어가려고 발을 동동 구른다. 이게 자본주의 법칙이다. 퇴폐한 자본주의를 선도하는 소위 잘사는 나라에서는 정도가 더 심하다. 빈부격차가 더 벌어지는 빈익빈 부익부, 야비한 상황 속에서 많은 붕어빵 아줌마는 상대적 박탈감, 생존 몸부림, 절망, 고독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 생의 벼랑 끝에 선다.
그곳에 선 붕어빵 아줌마들이 손을 내밀 때 과연 우리는 그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고 있는가. ‘겨울바람은 추워서 안기려는데 우리는 더 춥다고 밀쳐내는’ 몰인정과 사리사욕의 길을 가고 있진 않은가.
초가을로 들어서는 9월 말, 추석명절을 앞둔 이 시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잠시나마 붕어빵 아줌마의 곁으로 다가서 주었으면 한다. 그 속에서 행복의 가치를 찾았으면 한다.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는 이에게 가장 행복한 삶의 가치가 주어지는 법이다.
욕망을 극복하는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다. 그래서 욕망으로 뭉친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 가장 강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가장 강한 사람들이 꾸려나갔으면 한다.
그래야만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작은 외침들이 따스한 손길이 되어 붕어빵 아줌마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