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 = 발행인(시인 소설가) 김경홍] 이씨 조선, 소위 조선은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출범한 단군의 역사에서 있어서는 안 될 국가였다. 조선은 양반과 노비(평민, 상민)의 시대였다. 10%도 안 되는 소위 양반은 90% 이상의 민생들이 뜨약볕 속에서 피와 땀을 흘리는 그 시간, 되지도 않는 책장을 넘기며 ’에헴‘의 일상을 즐겼다. 그리고 그들은 해가 저물면 술집으로 흘러가 소녀들을 성의 노예로 삼고, 기혼녀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성폭행을 일삼은 망나니들이었다.
안타깝다. 역사상, 있어서는 안 될 양반의 횡포가 지금도 그들이 만들어 낸 ’법’이라는 포장지 속에서 합법화되고 있으니 말이다.
박정희와 육영수, 윤석열과 김건희를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선시대로 보면 평민, 육영수 여사는 양반 출신이었다.
1970년대, 늘 쫓겨 다니던 ‘좌파 아버지’조차 이런 말씀을 자주 하곤 했다.
“박정희는 서민 출신이다. 독재, 독재하지만, 안 그렇다. 그는 자신보다 민족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다. 육영수 여사도 그렇다”
요즘 들어 그 말씀이 새롭다.
박정희 대통령은 늘 민족의 앞날을 고민했다.
1967년 3월 30일, 구미(선산) 낙동대교 개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벌거벗은 선산 비봉산을 올려다보며 치사를 이렇게 읽어 내렸다.
“착할 선(善) 메 산(山)자인 선산의 비봉산을 보십시오. 벌거숭이 산에 나무가 있다 하더라도 앙상한 나무들일 뿐입니다. 외국은 전부 울창하고 무성합니다. 땅이 좋고 비가 잘 와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일 년 내내 거의 비가 안 오는 땅에서도 훌륭한 나무를 심어서 몇 년 내에 울창한 숲을 이뤘습니다. 여러분 우리 후손을 위해, 그들이 살아갈 나라를 위해 나무를 심고 가꿉시다”
박 대통령은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흐른 1968년 11월 11일 원평동 선산농산물가공공장 준공식에 참석해서도 나라의 앞날을 고민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우리 강산을 더 아름답고 쓸모 있게 가꾸어서 후손에게 길이 물려주는 일이야말로 우리 세대의 의무요, 사명입니다. 지도자 여러분 나를 위해 살기보다 민족과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
하지만 윤석열은 어땠는가.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저들을 척결시켜야 합니다”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그에게 민생의 아픔과 나라의 앞날은 안중에 없었다. 그만의 취중 잔치였다. 야당 대표와는 아예 담을 쌓았다. 그에겐 언제나 적이었다.
야당 대표를 만나기 위해 안간힘을 쏟던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서를 읽고 다시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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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박정희 생가보존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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