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문화타임즈 =발행인 김경홍] 삶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세월도 그렇다. 돌아보면 덧없음이다. 삶의 뒤안길에 소중한 흔적을 남겨야 하는 존재 가치다.
2009년 7월 27일, 7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 박세직 전 국회의원의 15주기를 보름여 앞두고 있다. 봉오리를 터뜨리던 봄날이 엊그제만 같은데...‘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다. ‘손을 맞잡고 장터로 가던 유년의 들길’처럼, 돌아보면 순간이다.
2003년 12월 15일 파란만장의 삶을 마감한 허주 김윤환 전 의원에 이어 6년 후인 2009년 박 전 의원이 영면은 구미시민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중앙 정치력이 지방의 흥망성쇄를 좌지우지하던 시절, 킹메이커로서,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서 중앙 정계를 쥐락펴락해 온 제1세대의 구미 현대정치사의 마감은 이후 구미에 한파를 몰아치게 한 예고편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금, 때로는 삿대를 빼 들던 세상이 그들을 그리움의 풍경 속으로 끌어들이는 이유다. 구미의 현실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 정치의 중심에 깊은 흔적을 남긴 그는 구미산단과 구미지역에 어떤 존재가치로 투영돼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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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직 전 국회의원. [사진 출처= 박세직 올림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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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에 없던 4산단 착공식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참석케 한 정치력취임 2개월 만인 1991년 서울시장직을 사직하고 1년 후인 1992년, 민주자유당 구미시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되는 것을 계기로 정치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박 전 의원은 그해 실시한 14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어진 1996년 15대 총선에서도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재선의원으로서 탄탄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1998년 4월 3일 송정동 모 한정식 식당에서 구미의 지역언론인들과 일정에 없던 오찬을 한 박 전 의원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혹시 말이야. 신한국당(미래통합당 전신)을 탈당하면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구미경제도 말이 아니잖아. 4산단 조성계획은 잡혀 있지만, 수년 때 한 발짝도 내딛질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야. 좋은 의견이 있으면 조언을 좀 해주게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날 오후 3시, 방송사는 ‘긴급 뉴스’로 ‘박세직 의원이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부총재의 자격으로 자민련에 입당했다“는 보도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날 지역 언론인들과 만난 박 전 의원은 이미 자민련 입당을 결정한 상태였고, 사전에 그 사실을 은유적으로 알렸던 것이다.
그 무렵 중앙정치는 요동쳤다. 같은 당 중진의 김종호 의원은 박 의원과 함께 자민련에 입당했다. 또 그해 6월 11일에는 자민련과 공동정부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국민회의로 구미 출신 박재홍 의원과 최기선 인천시장이 적을 옮겼다.
박세직 의원의 신한국당 탈당으로 구미 정가는 크게 술렁거렸다. 뜻을 같이한 주요 당직자, 도의원과 시의원들이 무더기 신한국당을 탈당해 자민련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미을의 일부 시의원과 J모 전 도의원 등은 신한국당에 남아 있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
말을 갈아타고 가는 길은 순탄치가 않았다. 보수 성향의 시민들을 중심으로 확산하는 비판 여론에 맞서 박 전 의원을 비롯한 탈당파들은 피폐화하는 구미공단 재건을 앞세우자며, 민심을 다독여 나갔다.
사실, 국민회의 집권 당시의 구미공단 사정은 나락(那落)으로 빠져들었다. OB 맥주 공장 광주 이전을 시작으로 비롯된 공동화의 바람은‘굴뚝 연기가 솟아오르지 않는 황량한 구미산단’의 처참한 풍경을 그려냈다. 이러자, 시민들은 1996년 9월 30일 3공단 조성과 함께 계획만 수립한 채 요지부동인 4산단 조기 조성을 염원했다. 하지만 기존 산단이 공동화하는 상황에서 4공단 착공 바람은 과유불급이었다. 특히 수자원공사가 정부 차원의 획기적인 지원이 없을 경우 자력으로 4공단을 조성할 재원을 마련할 수 없다고 공언하면서 희망의 프로젝트는 백지화 위기에 내몰렸다.
이처럼 구미산단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자, 시민들은‘구미경제 살리기 비상대책위’를 구성해 가동했고, 자민련 부총재를 맡고 있던 박세직 의원은 당시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김대중 대통령의 핫라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4산단 조기 조성을 위한 수순을 용의주도하게 밟아나갔다. 이 과정에서 4산단 조성에 정치의 명운을 걸다시피 한 박 의원은 4산단 착공식 당일, 대구에 내려와 있던 김대중 대통령을 일정에 잡혀있지도 않던 착공식에 참석시키는 기지를 발휘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초, 4산단 착공식 당일 김대중 대통령은 대구 행사를 마치고 귀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세직 의원은 대통령 비서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종필 총재 핫라인을 활용해 일정에 없던 대통령의 4산단 착공식 참석을 성사시킴으로써 프로젝트가 탄력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을 깐 것이다.
박세직 전 의원을 보필했던 보좌진들은 지금도 종종 일화 한 토막을 이렇게 들려준다.
"하루 4시간 이상 잠자는 법이 없었다. 잠자는 시간은 곧 죽는 시간이라고 말씀하시던 그 분은 차량을 이용하는 동안에도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걸어 구미산단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하기에 바빴다“
박세직 전 의원의 정치 행보에 대해 일각에서는 입신출세를 위해 소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훗날 역사는 구미를 위해 살신성인하려고 했던 구미의 중심 정치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구미 현대정치의 거목인 김윤환‧박세직 전 의원은 평소 주변인들에게“자신을 위해 살려거든 정치세계에 기웃거리지 마라.”는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의 구미를 리더하고 있는 지도자와 정치인들은 과연, 선배 정치인의 남긴 고언을 가슴 깊이 들여놓고 있을까.
‘될성부른 나무, 재목(材木)으로 길러내 지역발전의 재료로 써야 한다.’는 구미지역 원로들의 충고, 시민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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