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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작자·작곡가 영조의 ‘지금도 그리운 우리가족 30인의 이야기’... 삶! 애환의 고비마다 가장 먼저 달려와 손을 내밀어 주신 아버지·어머니!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입력 2024.05.08 15:23 수정 2024.05.08 15:30

부모님은 신(神)같은 존재

[기획/ 가정의 달 5월, K문화타임즈의 가족사랑 릴레이 캠페인] 지금도 그리운 우리 가족 30인의 이야기

4번 작자·작곡가 영조가→5번 바통을 유능종 ‘유능’ 대표변호사에게 넘겼습니다


4번 작자·작곡가 영조 ← 3번 김용보 전 구미시청 국장←2번 지대근 전 구미시청 국장←1번 k문화타임즈 김경홍 발행인

[K문화타임즈= 김미자 기자] 가정의 달 5월입니다.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살아온 날들, 돌아보면 들려주고 싶은 얘기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얘기들이 모이고 모여 아름다운 가정을 가꿔나가는 자양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K문화타임즈가 가정의 달 5월 ‘가족사랑 릴레이 캠페인, '지금도 그리운 우리 가족 30인의 이야기’ 를 이어갑니다.
*의견 보내실 곳 /카톡(김경홍), 메일 siin0122@hanmail.net, goguma1841@naver.com, 휴대폰 010-6504-7475
[편집자]

 
↑↑ 장미
[사진 출처= 다음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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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작사·작가 영조의 ‘지금더 그리운 우리가족 30인의 이야기’
삶! 애환의 고비마다 가장 먼저 달려와 손을 내밀어 주신 아버지·어머니!
부모님은 신(神)같은 존재


2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난 어린시절, 학용품과 과자를 받아먹는 맛으로 집 근처의 여름 성경학교를 다녔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복을 새로 산 다음날 영문도 모른 채 난생 처음 어머니를 따라 걸어서 2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산속 사찰을 찾았습니다.
아련한 시절, 돌아보면 어머니는 제 앞날을 밝혀주시려는 높고도 지극하신 사랑이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생각해 봅니다.
“내 생애에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란 어떤 의미였는가?”
어릴 적 다녔던 여름 성경학교와 하느님 그리고 중학교 때 연을 맺은 불교와 부처님, 세상을 살며 만났던 수많은 가르침과 다양한 종교, 그리고 그 속에 존중받고 있는 위대한 신(神)들의 전지전능.

누구나 사는 동안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몸살과 오한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삶의 굽이마다 좌절과 뜨거운 눈물도 맛봅니다.
그러한 삶! 애환의 고비마다 나를 위해 가장 먼저 달려와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전지전능한 신(神)도 부처도 아닌 오로지 아버지·어머니 두 분이셨습니다.
부모님은 기도를 하지 않아도 아픈 내 마음을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촛불을 켜고 100일 동안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아픈 나를 위해 늦은 시간에도 약을 사 들고 오신 분!
살아보니 나의 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신(神)은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셨습니다.

“막내랑 살고 싶단다”
늘 미소를 지으시던 어머니!
만나면 함께 노래 부르며 행복해하시던 어머니!
간절하게 주문을 외듯 어머니 귓전에 대고
“엄마 적어도 100살까지는 사셔야 합니다.”
수없이 약속하고 다짐을 받아두곤 했는데...
어머니는 올해 93세가 되셨고...예년과 달리 너무나도 병약해 지신 모습 앞에서 어버이날을 맞은 마음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불과 1년 전 어버이날만 해도 어머니와 함께 웃고 박수치며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부르고 또 불렀는데...맑은 5월 하늘에 어울리지 않는 무상이라는 글귀만 떠오릅니다.

부모님께서 지금껏 나를 신(神)보다 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신 것처럼 이제는 남은 시간 동안 내가 받은 모든 사랑을 후회 없이 어머니를 위해 쏟아부어야 한다는 마음을 5월의 길을 가며 다져봅니다.

살아보니 부모님은 신(神)보다 위대하셨습니다.
내 마음을 모두 알고 계셨고, 누구보다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던 분은 세상에 오직 부모님 이외엔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부모님은 신(神)같은 존재입니다!

---5월 8일 어버이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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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김용보 전 구미시청 국장의 ‘지금도 그리운 우리가족 30인 이야기’
늘 마음 한구석엔 아버지와 어머니...‘하늘나라에서 아프시지 않고 잘 계시겠지요’


어머님은 체격이 작으셨지만 억척같은 분이셨습니다.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 살면서 농사일, 땔감 마련 등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셨을 만큼 삶 자체가 ‘자나 깨나 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공직에 계셨던 아버님은 든든한 기둥이셨지만, 넉넉하지 못한 봉급으로 6남매(3남, 3녀)가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살림살이의 빈 곳간을 메꾼 것은 농사일은 물론 칡덩굴, 산약초 채취로 쏟은 어머님의 비지땀이었습니다.
그 희생 덕분에 우리 형제자매는 오늘도 큰 어려움 없이 단란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를 만큼 흐른 지금도 어머님이 남기신 아련한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고개를 떨구곤 합니다.
모내기를 마친 날이면 우리들은 마루에 누워 개구리 소리를 들으면서 장래 이야기를 나누었고, 힘드셨을 만도 하련만 저희의 종아리를 주물러주시곤 하시던 어머님의 사랑. 살아갈수록 더욱 영롱해 오는 그리움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을 울리는 것은 질병으로 고통을 앓으시다 세상을 떠나실 때 힘이 되어 주지 못한 아쉬움은 마음 한구석에 늘 죄스러운 한스러움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5월의 푸르름이 짙어오는 오늘, 아버님과 어머님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기도합니다.
“하늘나라에서 아프지 마시고 두 분 편하게 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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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지대근 전 구미시청 국장의 '지금도 그리운 우리가족 30인의 이야기'
‘비 내리는 5월이면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난 시절의 추억이 그립습니다. 이미 반백의 머리로 달려가는 그 시절의 어머니는 세월이 흐르고 흘렀지만, 이다지도 그리운지요.

그리운 어머니, 비 내리는 날이 좋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이맘때쯤이면 여지없이 어머니를 따라 들일에 나서곤 했지요. 비닐 없이 모든 밭작물을 노지 재배하던 당시에는 ‘어린 것이 무엇을 하겠느냐’는 말이 무색할 만큼 어린 일손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니, 그 시절 시골의 ‘어린이날’은 ‘들일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요즘처럼 함께 놀고 쉬는 날이 아니라, 온 식구들이 들로 나가서 고추를 심으면서 비지땀을 쏟곤 했지요.

따가운 햇볕이 내려 쏘여 등짝이 까지고 얼굴에서 후끈후끈 열기가 쏟아지는 그날, 우리 식구들도 목이 말랐지만, 고추 모종은 이미 목이 쳐져 있곤 했습니다.
어린 우리였지만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듯한’ 더 어린 고추를 살리기 위해 도랑으로 달려간 우리는 양은 주전자에 물을 퍼와서 고추를 살리곤 했지요. 지금 돌아보면 내 나이 열 살 정도였을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난 지금도 비 내리는 날이 너무 좋습니다.
놀기에 바쁜 어린시절, 들일 하기가 너무나도 싫던 추억이 기억 속의 트라우마가 되어서일까요. 그렇치만도 않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머니는 계란빵, 요즘으로 치면 카스테라를 만들어 주시곤 했습니다. 그날 내 담당은 부엌에서 계란흰자만 걸러놓은 재료를 부풀리게 하는 일이었지요.
오븐 같은 후라이판에 곤로가 달궈지면 계란 카스테라빵이 탄생(?)했는데, 세월이 흘러도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 주셨던 빵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를 직접 불러봅니다. 그리운 어머니, 내 목소리를 듣고 계실까요.
비 내리는 5월이 너무 좋습니다. 그리운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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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K문화타임즈 김경홍 발행인의 ‘지금도 그리운 우리가족 30인의 이야기’
‘어머니 몰래 라면을 끓려주시던 어린 시절의 누나’

중학교 입학을 앞둔 1970년대의 일입니다. 그 당시 중학교에 가려면 삭발(削髮)을 해야 했습니다.
제 형제는 2남 2녀였습니다. 어머니는 형제 중 대장인 누나에게 이발비를 주시면서 일터로 나가셨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라면 하면 부유한 이들에게만 돌아가는 귀중품(?)이었습니다.

가난했던 우리 형제는 이발비로 라면을 사다가 끓여 먹고, 누나는 대신 일회용 면도기로 제 머리를 삭발했습니다. 일터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얘 머리가 출가하는 출가승의 모습 같다”며, 저희들을 의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쿵쿵거리던 그 시절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요즘에는 종종 부모가 물려주신 재산을 놓고 형제들끼리 법정 다툼을 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5월 4일 늦은 밤, 힘들고 어려웠던 유년 시절을 돌아보며,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지금도 나는 형제들과 마음을 터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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