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안경을 쓴 것은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인 것 같다. 고교시절을 기억하는 친구들이 아직도 ‘까만 뿔 태냐’고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안경과의 인연은 10대에서 시작된 것 같다. 몇 번 시력 검사 후 교정도 하고 금속으로 뿔로 태를 바꾸었지만 여전히 처음의 것에 대한 향수도, 내용도, 사실도 변함이 거의 없다.
아무튼, 50대(?) 이후부터 가까이 있는 글을 볼 때는 내 몸처럼 붙어있던 안경을 벗어야 바로 읽을 수 있었고, 자판을 두드리는 것도 자유스러웠다. 특히 교실에서, 강단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글을 일어야 할 때의 불편은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 70줄이 넘어선 어느 날 갑자기 한쪽 눈에는 반쯤 검은 가람막이 낀 듯 보이지 않았고, 급기야 찾은 병원에서 CT촬영, 검사한 결과 망막의 출혈(의사선생의 말은 소위 망막에서의 출혈-뇌 중풍이 아닌 눈 중풍-)에 기인했다며 약을 처방해주고는 다시 오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 조금씩 검게 보이는(보이지 않던) 부분이 옅어졌으나 다시 검사한 결과는 녹녹치 않았다. 촬영결과 조금 돋아난 혹이 더 커져있으니 종합병원 안과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한다는 것이다.
20여일이 지나 서울의 모 대학병원에서의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단순한 주사약 투여정도인줄 알았는데, 7,8회의 촬영, 검사 후 다음날 주사를 맞으러 수술실로 오라는 것이다. 수술이라니....., 다음 날 일찍 도착한 병원이지만 시끄럽고 북적대기는 어제와 다름이 없었다.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에 캡까지 쓴 채 베드에 누웠다. 마취한 다음이라 크게 염려는 않았는데 조금 아플 것이라는 애교석인 말에 안심했지만 눈동자에 침을 찌르는 것인지 참 많이도 아팠다.
결국 3일간 두 시간마다 눈에 약(항생제?)을 넣으라, 내일 세수는 하지마라, 한 달 후 예약해 놓았으니 그때 다시보자는 등의 말을 듣고 병원을 나왔다(한쪽 눈은 봉대에 감긴 채...., 몇 시간 후에 붕대를 뜯어낸 다음 보이는 눈은 흰색의 눈동자가 아닌 선홍색 빛이었고 참을 수 있는 정도의 통증은 있었으나 초등학생마냥 시키는 대로 했다. 진찰을 위해 숱한 조사, 의료보험도 되지 않는 약값, 이리저리해서 준비해갔던 50여만 원의 돈이 모두 소진되었다.
그러면서 받은 삶의 교훈은 50만원의 돈으로 치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오고, 볼 것은 정상에 가까운 왼쪽 눈이었고, 오른쪽 눈은 난시에다 0.3정도의 매우 심각한 시력을 가졌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살아 생활하면서 책도 읽고, 글을 쓴 것은 왼쪽의 성한 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지금의 내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보이는 왼쪽의 한 눈이었다는 말이면서 오른쪽의 눈은 높은 도수의 안경이 있어야 가능했던 것인데......단순히 말로만, 안경점에서만 시키는 대로 살아왔던 모양이 우습게 여겨졌다. 그래, 그렇구나. 우리가 두 눈을 가지고 앞은 보면서 산다고 그렇게 믿어왔지만 나를 지켜준 것은 왼쪽의 시력 1.0정도의 성한 눈 덕분이었다.
내 눈을 닮은 모양의 연역이 가능하다. 진영논리라는 이름으로 좌, 우가 갈리고, 같은 모양, 같은 일에 대해 아귀다툼을 하는 나라꼴이 측은하다.
제발 0.3정도의, 안경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눈을 가진 오른쪽의 악다구니를 보니 눈알에 바늘을 찌러 수술을 해야 하는 중한 아픔인 듯하고, 그 모양세가 따갑다.
대통령으로 당선 된 후 숱한 문제의 발생(해외에 나갔다면 사고를 저지르는, 물가에 둔 아이 같은), 최근 언론통제의 주축 이동관 후보자 임명이나 준비조차 허술했던 국제 잼버리대회에서 그 절정을 보여준 오른쪽의 눈 만 가진 자들의 횡포에 한수 거든다. 눈동자에 바늘을 찌르는 아픔을 겪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제발 왼쪽의 성한 눈의 판단과 결정에 대해 겸손해지는 모습이 있어야 몸 전체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