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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원 전 시의원이 박 대통령의 얼이 서린 직향나무를 가르키고 있다. [사진 = 김경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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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화타임즈 = 김경홍 기자] 박정희 대통령은 1년 반 만에 구미를 두 번 방문할 정도로 고향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 열정의 밑거름이 구미를 산림녹화로 상징되는 자연보호 발상지이자, 산업근대화의 중심에 서게 했다.
1967년 3월 30일, 구미(선산) 낙동대교 개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벌거벗은 선산 비봉산을 올려다보며 치사를 이렇게 읽어 내렸다.
“착할 선(善) 메 산(山)자인 선산의 비봉산을 보십시오. 벌거숭이 산에 나무가 있다 하더라도 앙상한 나무들일 뿐입니다. 외국은 전부 울창하고 무성합니다. 땅이 좋고 비가 잘 와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일 년 내내 거의 비가 안 오는 땅에서도 훌륭한 나무를 심어서 몇 년 내에 울창한 숲을 이뤘습니다.
(중략) 우리들 당대에는 잘 사는 부자, 울창한 수림을 가진 나라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들 다음 대에 가서는 우리도 남과 같이 잘 살고, 수림이 울창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박 대통령은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흐른 1968년 11월 11일 원평동 선산 농산물 가공공장 준공식에 참석해서도 산림녹화와 자주에 의한 경제부흥론을 역설했다.
“사업의 타당성, 미래 국가 경제에 대한 기여도에 부합할 수 있는 타당한 사업 계획안을 만들어야 하고, 이런 연후에 연고(고향 구미)를 활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중략)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우리 강산을 더 아름답고 쓸모 있게 가꾸어서 후손에게 길이 물려주는 일이야말로 우리 세대의 의무요, 사명입니다.”
그날, 고향 방문을 뜨겁게 환영하는 주민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박 대통령은 준공식이 끝난 후 선산 농산물가공공장 입구에서 지역 유지들과 함께 기념식수를 했다. 그 나무가 바로 이규원 전 시의원이 부친의 유업을 받들어 지금까지 가꿔오고 있는 두 그루의 직향나무이다.
11일 만난 이규원 전 시의원은 “박 대통령은 산림녹화와 경제부흥을 기원하자는 의미를 담아 두 그루의 직향나무를 식수했다.”며, 부친 이종록 옹으로부터 전해 들은 일화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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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원 전 시의원이 박 대통령의 얼이 서린 직향나무를 가르키고 있다. [사진 = 김경홍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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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직향나무는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1984년 시작한 원평택지개발사업의 파고가 선산 농산물가공공장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조합장은 맡았던 이종록 옹이 사업이 준공되기 1년 전인 1987년 지금의 형곡2동 효자봉 기슭 아래에 자리 잡은 본인 소유의 불당농원으로 이식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부친의 유업을 받들어 2023년 현재까지 두 그루의 직향나무를 가꿔오고 있는 이규원 전 시의원은 장세용 시장 시절인 2020년 역사적 의미를 담은 박 대통령의 유산을 시민과 함께 기려야 한다고 판단해 구미시에 무상 기증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현장을 실사한 2명의 관계 공무원은 이식 여부를 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 감감무소식이었다.
이 전 시의원은“ 외롭고 고독한 풍상(風霜)의 60년 세월을 효자봉 기슭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텨온 온 직향나무를 새마을테마파크로 옮겨 박 대통령의 얼이 서린 유산을 시민 모두와 공유하기를 바란다.”며 무상 기증 의사를 거듭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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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줄기에 풍상의 60년 세월이 진한 물결로 흐르고 있다. [사진 = 김경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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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향나무 두 그루를 살린 이종록 옹⇥ 형곡동 오폭사건 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 발족한 주인공2012년 2월 8일 5분 발언을 통해 형곡동 오폭사건에 따른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을 촉구한 구미시의회 당시 손홍섭‧ 이규원 전 시의원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시무실과 사창으로 불리던 형곡동은 130여 호가 사는 산간 농촌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금오산 자락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지리적인 특수성 때문에 김천, 북삼을 비롯한 사곡, 상모, 임은, 오태, 광평 등 인근 지역에서 피난을 가지 못한 주민들이 피신처로 몰려들 만큼 안전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치열했던 1950년 8월 16일 (음력 7월 2일) 오전 10시경, 형곡동 주민들과 피난민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냇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미군 폭격기가 무차별 폭격을 가해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는 북한군이 총공세로 임시 수도인 대구 방어선의 함락이 우려되던 때였다. 위급한 상황에서 유엔군은 대구를 사수하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해 다부동 전투를 전개했고 북한군은 낙동강 반대쪽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형곡 지역 시무실과 사창 두 마을이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고, 와중에 형곡동 주민과 피난민 등 130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지울 수 없는 형곡동 오폭사건의 악몽 속에서 살아온 생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참극이 발생하고 40년이 지난 1992년 ‘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당시 위원회는‘미국의 미 자도 꺼내지 말라’는 국방부로부터의 회신을 받고 좌절해야 했다. 또 2005년에도 구미시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진정서를 냈으나 시정에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1년 후인 2006년 11월 28일 이규원 전 구미시의회 의원은 마감 시한을 이틀을 앞두고 진정서를 작성하고,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과거사위에 자료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2007년 1월 위령탑 건립 추진위는 오매불망 그리던 ‘결정통지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 참혹한 비극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한 이가 바로 이규원 전 시의원의 부친인 바로 고(故)이종록 옹이다.